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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분야

한국교회의 쟁점들(알렌 입국-일제치하)

안녕하세요!! 평생 행복 하고픈 콘텐츠 마케터 입니다.

오늘은 해피캠퍼스에서 발췌한 “한국교회의 쟁점들(알렌 입국-일제치하)” 내용을 정리하여 알려드립니다.

 

목차

1.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과 언더우드 입국
2. 성서 번역 사업
3.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형태에서 서민들의 입교와 지식층의 입교 비교
4. 1907년 대 부흥운동에서 그 운동의 결과
5. 장로교 독립노회의 창립
6. 교회의 친일 행각
7. 문선명과 박태선 계열 (한국교회의 이단 황국주 측면에서)

 

본문내용일부

1.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과 언더우드 입국

(1) 알렌의 입국
1884년 9월 이승훈이 북경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영세를 받은 때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때에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이 개신교 첫 선교사로 들어왔다. 1883년 의사자격을 얻은 알렌은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받고 1883년 북장로회의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파송지에서의 분란과 아내의 건강문제로 존 더 기후가 따뜻한 한국으로 선교지를 옮겼으면 하던 차에 뉴욕본부로부터 허락을 받고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미국 공사관의 월급을 받지 않는 의사로 일하던 알렌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통해서 조선 왕실과 연결이 되는데, 이를 언더우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라고 술회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수구파의 거두이며 민왕후의 조카인 민영익의 중한 상처를 알렌은 치료하였고, 이를 계기로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알렌는 병원을 설립하기 위하여 궁중의 허가를 얻었고, 1885년 4월 10일에 광혜원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개원한지 2주일 만에 제중원으로 바꾸었다.

(2) 언더우드의 입국
1859년 출생한 언더우드는 1881년 화란 개혁교회 계통의 뉴 브른스윅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2학년때 한미조약이 체결되고, 급우중 하나가 이 기사가 실린 시문을 교실에 붙인 것을 보고서 처음 한국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1884년 11월 화란 개혁교회의 뉴 브른스윅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그는 선교사로 나가려고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아직 한국에 지원자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부터 “왜 네가 가지 못하느냐”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북장로교회로부터 1884년 7월 파송을 받은 그는 먼저 1885년 1월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한국말을 배우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주일에 이전에 미국신학교대회에서 만났던 아펜젤러 부부와 동시에 한국땅을 들어오게 된다. 아펜젤러부부는 미국 북감리교회의 파송을 받고 왔기에 따라서 한국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같은 날 도찬한 것이 되었다.

 

참고문헌

김양선. 『간추린 한국교회사』.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62.
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 서울: 기독교문사, 1971.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4.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서춘웅, 『교회와 이단』 . 서울: 크리스챤 서적, 2010.
한우근. 『한국통사』. 서울: 을유문화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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