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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 배경과 진행과정,피해실태연구 및 진상규명과 교훈 및 느낀점

안녕하세요!! 행복한 콘텐츠 마케터 입니다.

오늘은 해피캠퍼스에서 발췌한 “제주43사건 배경과 진행과정,피해실태연구 및 진상규명과 교훈 및 느낀점” 내용을 정리하여 알려드립니다.

목차

1. 제주43 사건의 배경
2. 제주43사건 시작과 진행과정
3. 제주43사건 피해실태 분석
4. 오라리방화사건 연구
5. 제주 43사건의 진상규명
6. 제주43이 남긴 교훈
7. 결론 및 느낀점

 

본문내용일부

1. 제주43 사건의 배경

제주43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3.1절 발포사건은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反警)활동을 전개했다.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달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참고문헌

제주4.3 진상보고서
이제사 말햄수다

위와 같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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